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신천지/최선의 성군

[신천지로 오는 길] 고국에서 쌓은 신앙, 해외에서 진리로 보답 받다(1)


[신천지로 오는 길]





고국에서 쌓은 신앙, 해외에서 진리로 보답 받다(1)

 

 

저는 교육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신앙이 돈독하신 부모님을 따라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부모님들은 저희 형제들을 믿음으로 엄하게 키우셨습니다.

 

유년 주일학교부터 시작하여 주일 성수는 물론이요

새벽기도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교회와 부모님의 가르침은 물론 제 나름대로 성경 신구약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특히 성경을 많이 외우시는 어머님을 본받았습니다.

 

그 후 병원 취업차 독일로 오게 되었습니다.

독일에 온 후에도 여러 명의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선교사와 다른 자매들과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여

동료들을 전도해서 침례받게 했지요.

 

그 후 결혼함과 동시에 육지로 나와서 한인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헌신과 봉사는 물론이요 부흥집회란 집회는 빠짐없이 다니며

말씀 듣고 수련회나 세미나 기도모임에 전심전력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굳게 믿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롬 10:2~3)

 

그러나 이러한 제 신앙관이 남편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로 인한 협박과 고난과 시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차라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하며 견디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제 신앙만큼은 어떤 방해에도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과 남편에게는 충실한 아내요 어머니로서 할 도리는 다하면서도

예수님 믿음으로 받는 교통은 주님의 몫이라고 그저 기도로 매달렸습니다.

 

그 때 제가 남편에게 맞아 죽었다면 이 생명의 복음을 받지 못하였을 터이요

그러면 저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삶은 제게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믿음의 유산대로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과

다음으로 직장근무와 주님께서 허락하신 두 자녀 양육에 시간을 쓰는 것뿐이었습니다.

 

저의 이런 보수적인 신앙관 때문에 늘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의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주님께 매달렸지만

그 도가 너무나 지나칠 때는

“주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세요”하고 눈물로 기도한 적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까만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는 두 자녀를 보면 새롭게 담대해졌습니다.

어찌하든지 부모님께 받은 믿음의 유산을

어린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컸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갈급하여 물을 찾듯이 진리가 있다는 교회,

은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이 교회 저 교회 창기처럼 찾아다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어느 교회 목사님이든 부흥강사님이든

십일조 헌금 잘하고 주일 성수, 그저 시키는 대로 잘하면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며

가정얘기나 세상지식으로 귀한 설교시간을 끝내니

갈급한 제 마음에 와 닿는 진리의 시원한 생명수는 맛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세상 학문보다 성경 66권을 제대로 배워서

참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나도 함께 거하게 해달라는 것과,

제게 영 분별하는 은사를 주시길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몇 번 만났던 두 집사님을 일년 반 전에 제게 보내 주셨습니다.

함께 교제하던 중 서로의 신앙관을 얘기하다가 제게 문득

“집사님 성경공부 좀 해 보실래요? 예사 말씀이 아니지요.”

제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