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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신천지/하늘나팔소리

[신천지 에세이] 아내의 손길로 교회에 갔어요

[신천지 에세이] 아내의 손길로 교회에 갔어요



 

눈부신 아침, 새천년 6월이다. 햇살은 팔랑대는 아내의 옷고름에 팔랑팔랑 부서진다. 약국을 지나 가구점 거울에 뒷모습을 비춰 보며, 비녀가 정말 어울리느냐고 물어 보는 아내가 예쁘다. 그녀에게 나도 오늘은 예쁜 남자일까? 교회에 처음 가는 남편 옆에 노란 저고리와 연보라 치마. 긴 머리를 쪽쪄 올려 목이 하얗게 드러난 여자가 옆의 남자가 남편이 맞나 자꾸 쳐다본다.

 

이런 외출이 얼마만인가. 참 드물었다. 결혼 20년 동안 손가락으로 셀 만큼. 연애시절까지 24년의 연륜이지만 한복차림의 아내는 또 다른 새로움이다. 오랜 세월 무던히도 순종해준 아내에게 난 몇 점쯤 되는 남편일까.



20년은 아내가 억척 여인으로 변한 세월이기도 하다. 맞벌이에,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집안 대소사에 종종 걸음을 친 세월이다. 이사도 8번이나 했지만 한 번도 내가 고르거나 계약한 집이 없다. 이재에 밝지 못해 이사가 귀찮다고 투정만 한 남편. 사는 재주가 빵점인 내가 지금의 요량쯤 살기까진 아내의 억척 때문인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런 아내에게 선물도 변변히 해본 기억이 없다. 그래도 아이들이 소풍 때 사온 팔찌나 머리핀에 더 행복해 한 여자. 그런 아내와 오늘은 며칠간의 냉전을 끝낸 날이다.

 

사랑은 싸울수록 쌓이는 것일까. 그동안 티격태격 많이도 부딪혔지만 이번 냉전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었다. 아주 사소한 다툼이었는데 아내가 '이혼'운운 했기 때문이다. 결혼 20주년 기념여행을 의논하다 이혼이라니! 그런 말은 내 집 울타리 밖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인 줄 알았는데 충격이었다. 싸움이 끝나더라도 이미 상처가 되어버린 단어 '이혼'이란 말을 다시는 꺼낼 수 없도록 나는 완벽히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냉전이 길어지면서 아내가 애처롭기도 했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서로 잘 살자는 이야기들 아니었나. 늘 옳았던 아내의 설득에 남자의 자존심만으로 눌러온 내 꼴이 밉기도 했다. 사과하리라. 화해를 결심했지만 좀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데 어제 아침, 머뭇머뭇 아내가 말을 붙여왔다. 자기 친구들 부부동반 모임에 나올 수 있냐고. 반가웠지만 시큰둥하게 장소를 물었다. 내심 화해의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화장실 안에서만 “오- 예”를 외쳤다. 그러나 선물까지 사러 백화점에 들른 것이 일을 어그러트리고 말았다. 지하 주차장에 반시간이나 갇히는 바람에 약속시간에 늦고 만 것이다. 친구들 틈에 토라져 있을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가버린 여자는 내가 핸드폰 불통 지역에서 헤매는 동안 집으로 전화를 걸었단다. 집엔 아들아이뿐이었는데 다짜고짜 물었겠지.

"지금 뭐해요?"

"테레비 봐."

"당신 정말 그럴 거예욧?"

찰칵, 전화를 끊은 아내는 뾰루퉁히 나가버렸단다. 이타저타 말도 없이. 혹시 집에 갔을까싶어 전화를 했더니 아들 녀석이 싱긋댄다.

"아빠, 내가 감기 땜에 목소리 좀 깔았더니 엄만 화를 내며 끊더라?"

나와 아들의 목소리를 혼동한 아내는 그 시간에 집에 있는 남편이 약속장소에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들 녀석 때문에 바람맞은 날. 혼자 집에 오는 길은 많은 생각들이 따라 걸었다. 날로 의젓해 지는 아들아이의 대견스러움. 어느새 대학생이 된 딸. 아들에게 당신 그러지 말라며 화를 내는 아내. 모두가 사랑인데 일은 왜 이리 꼬일까.

 

무거운 마음으로 열기 싫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남편에게 바람맞은 아내는 제 키만 한 아들 뒤에 숨어서 아들 땜에 바람맞은 남편에게 빙긋 웃었다. 풀린 것이다. 나는 신발장에 준비해 둔 벽보를 꺼냈다. 낱장에 한 글자씩 쓴 종이를 끝부터 거꾸로 붙여나가고 아들아이는 따라 읽는다.

「음,걸,첫,의,국,애,은,랑,사,내,아」우리의 냉전은 이렇게 끝났다.



햇살이 화사한 거리. 이젠 정말 잘해 주리란 다짐으로 손을 꼭 쥐며 다시 아내를 본다. 쑥스럽다며 눈을 가리는 아내. 이번엔 옷고름이 날려 눈을 가린다. 팔랑대는 바람, 바람결이 좋다. 팔랑팔랑 옷고름이 입술까지 쓰다듬고 간다.

 

아내의 손끝처럼 용서의 손길처럼. 이 고운 아내의 소망은 무엇이던가. 크리스천 남편이었다. 아니 건성으로라도 교회에 같이 가주는 남편이면 된다고 했었다. 들어주리라, 들어주리라. 천국까지 함께 가자는데 무얼 망설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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