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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자료실/종교 인물

(신천지) 성철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신천지의 종교 인물 탐구
성철스님의 구도와 삶의 발자취를 따라  뒤돌아 봅니다.
"가장 쉬운‘ 이치’가 삶의 해답… 형식적인 수행 의미 없어 "


스님, 대한민국을 어떻게 더 부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공무원들이 부정부패하지 말고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뭔가 특별한 해결책을 찾고 싶어 스님을 찾아간 권력가는 ‘어린애도 다 아는 말을 한다’며 욕을 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권력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스님은 퇴옹 성철(1912~1993) 큰스님 이셨습니다.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며, 법명은 성철(性徹), 법호는 퇴옹(退翁)이며. 1912년 음력 2월 19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으며 25세 되던 1936년 봄 출가했습니다.

권력가가 찾아간 곳은 성철큰스님이 있는 절이었다. 그는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스님의 대답에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알고 생각하는 것으로 말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알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따끔한 지적이 숨어있었건 것이죠,

가장 쉬운 이치가 삶의 해답인 법이었으며. 머리에서 심장으로 내려오는 길이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이고 공감됩니다. 

성철스님의 수행은 하는 척만 하는 형식적인 수행이 아니며. 실질적인 삶 자체라고 생각 됩니다.

대표적인 수행이 세상을 놀라게 한 ‘장좌불와’와 ‘동구불출’입니다.
스님은 잘 때도 몸을 땅에 눕히지 않았다고 하셨답니다. 1944년 문경 대승사로 옮겨 8년 동안이나 지속된 ‘장좌불와’ 수행이다. 3년 후 스님은 이번엔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을 찾아가 철망을 치고 신도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막은 다음 10년 동안 수행을 했으며,동구불출 수행입니다.

이는 단호한 결단을 해야만 이뤄낼 수 있는 수행이다.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다가는 끝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성철큰스님은 이 어렵고도 힘든 수행을 자처했다. 이 때문에 열반한 지 18년이 넘었지만 그 이름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1947년에는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 답게 살자’는 슬로건을 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시기도 하셨고 출가자로서의 본분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불가에서 결사의 의미는 교단 혁신을 추구하는 승가운동으로 해석된다 합니다.

역사적으로 결사는 불교가 쇠퇴하고 정법이 쇠락해갈 때 나타나며, 고려시대 지눌스님의 정혜결사나 한말의 경허스님의 수선결사가 대표적입니다.

성철큰스님은 출가를 결심할 때부터 스스로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세운 듯하다. 출가를 결심하고 적은 다음 시에서 그의 결연한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선략)… 그 누가 잠깐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어느 누가 막더라도 진리라는 대의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다짐이 읽힌다.

 

그는 1981년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었고,
이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가 회자되며 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 때문에 더 불교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죠.

스님은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하라’는 마지막 한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들어셨습니다.

스님이 남긴 유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유언은 다음과 같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해석하면 ‘일생 동안 미친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수미산을 덮은 죄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송이 꽃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기독교 일부에서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 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등으로 해석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진리는 간단 명료하니 참 이치입니다.
확신과 깨닮이 있는 성군은  군더더기 말이 필요 하지 않는 것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