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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자료실/종교 인물

여성으로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석이 된 '김 마리아 애국지사'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김 마리아 애국지사의 어록 중에서>




<김마리아 애국투사>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6.18-1944.3.13)

김마리아 애국지사는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독자여서 손자를 빨리 보고 싶어 해 아버지 윤방을
아홉 살 연상인 몽은과 결혼 시켰는데, 이때 아버지 나이 9살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태어나는 아이 셋이 모두 딸이었습니다.

당시 대갓집에서는 독선생을 불러 사랑방에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김마리아도 위의 언니 둘과 삼촌, 고모와 함께 ‘천자문’ ‘동몽선습’들을 배우며 학문에
정진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마리아가 세 살 먹던 해에 34살이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99칸 종갓집 맏며느리 자리를 뒤로하고 세 딸의 교육을 위해 따로
이사하는 열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황해도 연안의 서남쪽 포구에 세운 소래학교는,
광산 김씨 집안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로 이곳은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역이기도 합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던 김마리아는,
소래학교에 입학한 지 여섯 달 만에 상급생을 통틀어 전교에서 1등으로 뽑힐 만큼
총명했으며
2등은 고모인 김필례가 차지했다. 딸들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던 어머니는 김마리아가 14살 되던 해 겨울 세상을 등지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삼남매 중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유학을 시켜 달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마리아는 애국지사들이
드나드는 서울의 삼촌 집에 머물면서 애국사상을 싹 틔운다.
15살이던 1906년 큰 삼촌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두 언니와 고모가 연동여학교(현, 정신여자중학교)에 다니던 때라 삼촌에게 졸라
연동여학교로 옮기면서 학업을 했습니다.

1910년에 졸업 뒤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3년간 교사를 지냈고,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배운 뒤,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 대학 예비과에 입학하였으며,

1918년 말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들어가 황애시덕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습니다.

김 마리아는 일제강점기 여성으로서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김 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을 이뤘을 것”이라는
도산 안창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가 보여준 독립에 대한 의지와 정신은
대단했습니다. 

마리아는 세례명이자 이름으로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지어 주셨다고 합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여 전,
동경 유학생들이 먼저 한국의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바로 2.8독립선언으로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가 있던 김 마리아도 다른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대회에 참석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지속적인 대일항쟁을
펼쳐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으며,
이때 몇 시간의 취조를 받고 풀려난 그의 마음속엔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하게 끓어올랐습니다.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내에 전국적인 독립운동과 여성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이에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옷 속에 숨겨 2월 15일 우리나라로 귀국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계 동지들을 찾아가,
독립선언문을 보여주면서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렸고,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함을 호소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책임을 맡았던
이종일 보성사 사장의 비망록에서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김 마리아가
 천도교 본부와 보성사를 찾아와 동경 한국인 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할 것을 힘써 권유했다.” 

마리아 선생은,
이뿐 아니라 황해도 등지를 돌며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간절히 호소했으며.
그러던 중 3월 5일 정신여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에 참여해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면서
일본에 체포되어
이로 인해 6개월간 여린 몸으로 갖은 악형과 고문을 받아 출옥한
후에도 계속 고문후유증에 시달렸지만, 여전히 조국독립의 꿈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출옥 후 대한민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으며,
단체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고, 침체된 여성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애국부인회는 투옥된 남녀 애국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의 보호하고, 임시정부
후원 활동을 펼쳐나갔던 것입니다

이 같은 활동으로,
또다시 체포와 고문을 겪은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23년에는 미국유학을 했으며, 
그곳에서도 여전히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뉴욕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근화회(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지냈습니다.

근화회는,
미국에 사는 한인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출판․강연 등으로 일본의 식민정책을 해외에
알리는 일,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 보내는 일 등을 담당했으며

이같이 그는 일본과 우리나라, 중국, 미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며
일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쏟았다.
하지만 1944년 3월 해방의 꿈을 보지 못한 채 고문후유증으로 5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
마감했습니다.


후기...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목숨 내놓고 활동 하셨지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포스팅 하면서 이런 선지자분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안녕과 평안을
누리고 살수 있기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목숨걸고 독립운동을 할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독교 종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와의 범죄로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다시 찾으시기 위해서,
죄 없는 사람들과 영원히 사시고자, 
사랑하시는 선지자들, 아드님까지도, 희생의 아픔을 당하시면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는데요.. 그 뜻을 아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상관없이 본인의 세상욕심을 구하기 위해 , 간구하고..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리자구요..
신천지 12지파와 약속의 목자가 계신곳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신앙하는 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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