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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자료실/종교 인물

종교와 인물 '호국의 등불' 서산대사


종교와 인물  '호국의 등불'  서산대사

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속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1534년(중종 29)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錄)》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습니다


 서선대사의 초상


1520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난 서산대사는 9살에 어머니, 10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 후 서울로 내려와서 3년간 성균관에서 글과 무예를 익였다고 합니다. 그 후 과거를 보았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친구들과 지리사느이 화엄사동, 칠불동 등 사찰을 돌아다니다가 숭인이라는 노 스님을 만나 그 스님의 권유로 다양한 붕교 경전과 선(禪) 서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서산대사는 이 경전들의 교리를 깊게 탐구하고 영관대사의 제자가 되어 3년간 선 수행을 했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후 1549년 승과에 급제하여 대선을 거처 선교양종판사직에 올랐다고 합니다.그러나 이 선교양종판사직이 추구하는 뜻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등 전국을 다니며 스스로를 갈고 닦았으며 후학을 길러 내기도 하였습니다.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며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기원하도록 하고 , 나머지는 제가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습니다."
73세의 고령임에도 서산대사(휴정,1520-1604)는 승병을 모으고 통솔하여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위태로워진 나라 조선을 구하고쟈하는 마음에는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임금의 요청에 승군을 일으킬 것을 자원하여 승려들을 모았으며, 그의 제자인 유정,뇌묵,처영,이허 영규,중관 해안대사를 등 수많은 승려가 전쟁에 참여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호국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시대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종교인들은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일제 강점기 3.1독립선언 당시에도 그랬고,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기에 서산대사는 73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하여 위태로운 나라 구하기에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서산대사의 핵심적인 사상중 하나가 유교,불교,도교의 핵심 가르침이 같다는 '삼교일치사상'입니다. 이는 "세 가지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이 저마자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여 서로 모이지 않는다, 내가 간략히 이 세문을 열어서 통하게 하려 한다"라고 한 그의 저서 '삼가귀감'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자신의 것과 다르다면 무조건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배척하는 종교계가 본 받아야 될 것입니다.
서산대사는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도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 했으며,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자신의 영정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는 가부좌 상태로 입적 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85세 였습니다.
 


진리의 성읍인 신천인의 무용


서산대사께서 의견을 일치하기 위해 유교,불교,도교의 '삼교일치사상'을 주장한 것처럼, 현 시대도 내 종교, 네 종교 편 가르고 배척할 것 아니라 6000천 봉해졌던 계시가 열려져 신약에 약속이 되었는  한 택한 목자를 찾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 드리는 것이 현 시대의 참 종교인이 아닐런지요!!